90년대 ‘낭만학번’의 추억


[from 동아닷컴 :: 주간동아]



아.. 이기사 보다가 울컥..


삐삐, PC통신, 농구, KINO(!!), 포스트모더니즘, 한총련, 홍대문화, 심야FM라디오.. ㅠ_ㅠ










[무선호출기] 97학번·김유진(자유기고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97학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뒤였다. 그저 ‘015’에 지나지 않던 그는 나에게 선택돼 10자리 숫자의 주인이 됐다. 그의 주거지는 주로 하의 주머니 속. 지금의 휴대전화처럼 평소엔 시계로 있다가 호출이 오면 자기 몸을 떨거나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제 기능을 했는데, 그때마다 허리춤 벨트고리를 물고 있는 집게와 거기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겨 밖으로 끌어내곤 했다.

그의 본명은 무선호출기, 보통 ‘삐삐’라는 예명으로 통했다. 공중전화 앞에 줄을 늘어선 사람들 바로 옆에서 폼 잡으며 전화를 ‘걸던’ 시티폰 사용자,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비치된 커피숍과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소리치던 “1234 호출하신 분이요!”까지. 지금은 어색한 이 풍경들이 모두 1990년대 중·후반을 주름잡던 그 작은 기계의 위력이다.

일방향 음성 통신수단으로서의 매력을 가진 삐삐의 존재는 내 대학 신입생 생활을 장악했다. 처음 인사한 과 선배나 아직은 어색한 동기들과 주고받기 시작했던 음성 메시지는 친밀한 감정을 교류하는 다리 구실을 했고, 그러다 보니 하굣길 집 앞의 한적한 공중전화에 들러 끊임없이 동전을 넣어가며 매일 20여 분씩 메시지를 남기는 행위는 하루 일과의 마무리 의식이 됐다.

학번을 적은 종이로 출석을 확인하던 한 강의에서는 모범생 친구의 삐삐에 학번을 찍어보내 대리출석을 부탁하기도 했으며,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인지 ‘눈 삔’ 남학생의 서툰 고백인지 모를 숫자 ‘1010235(열렬히 사모)’나 ‘1177155404(I MISS YOU)’가 내 삐삐에 찍힐 때는 하루 종일 설레는 기분으로 캠퍼스를 돌아다녔던 것도 같다. 교환원이 내용을 듣고 글자를 전송하던 문자삐삐로의 진화도 무색하게, 1998년 중반부터 대중화된 휴대전화 서비스는 당연하게도 삐삐의 종말을 예고했다. 휴대전화를 빌리는 친구보다 빌려주는 친구가 더 많아질 때쯤 나 역시 삐삐와 이별했다. 99학번 후배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입학한 것을 기점으로 삐삐는 캠퍼스에서 금세 사라져버렸다. 이 짧디 짧지만 낭만적인 삐삐 전성기에 내 대학시절이 들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막힌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못 올 그 시절처럼, 10년 전 헤어진 내 빨간 삐삐가 문득 그리워진다.




[PC통신] 94학번·윤신철(커뮤니케이션 신화 PR팀장)








본명보다 통신상 애칭이 더 정겹게 느껴지던 그 시절, 나의 닉네임은 ‘tomato17’이었다. 어떤 계기로 지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꽤 오랜 기간 애착을 갖고 사용한 아이디였는데, 이를 바꾸게 된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졌다.

대학에 갓 입학한 모든 스무 살 청춘이 그렇듯, 당시 내 최고 관심사는 이성교제였다. 그때만 해도 숫기가 없던 터라 남들 다 한다는 미팅이나 길거리 헌팅엔 흥미가 없었다. 이 때문에 PC통신 채팅방은 이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청량음료’ 같은 존재였다.

요즘은 채팅이 음성적으로 많이 변질됐지만 당시만 해도 괜찮은 이성을 건전하게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였다. 나는 ‘퀸카’와의 특별한 만남을 꿈꾸며 채팅방에서 긴 밤을 새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속 전도연처럼 내 마음에 ‘접속’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아이디는 ‘Blue Straw berry’. 첫 만남은 여러 사람과 함께했던 채팅방에서였지만,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유독 그녀하고만 많은 대화가 오갔다. 농담처럼 “둘 다 과일이라 왠지 말이 통하는 것 같다”는 내 뻔한 수작에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랍니다”며 무식함을 일깨워준 그녀. 고백하건대 난 토마토가 채소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풋사과가 맛이 없는 건 비바람 속에서 고난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듯, 내 사랑도 설익은 탓인지 일찍 열매가 떨어졌다. 만남에 이유가 없듯, 헤어짐 역시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나는 그녀의 딸기를 파란색으로 만든 생채기를 확인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PC통신은 내 20대에 찬란한 기억을 선물했다. ‘새롬 데이터맨’이나 ‘이야기’ 같은 접속 프로그램으로 ‘나우누리’ ‘천리안’ ‘하이텔’ 같은 통신서비스에 접속하면 별세계 같은 다른 세상이 열렸다. 이곳에서 나를 비롯한 1990년대 학번들은 시대, 민중, 정의에 대한 토론을 벌였고 채팅으로 외로움을 달랬으며 때로 청춘의 열병을 앓기도 했다.

그 때문일까. 훨씬 빠르고 편리한 인터넷이 보급된 지금도 나는 1990년대 청춘들의 ‘사랑방’이자 ‘고해소(告解所)’가 돼준 그 푸른색 바탕화면을 잊을 수 없다.






[농구] 95학번·최용석(‘스포츠 칸’ 기자








나를 포함한 1990년대 학번은 80년대 미국 NBA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과 한국의 ‘농구 대통령’ 허재의 농구를 보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허동택’ 트리오에서 비롯된 농구 인기는 1990년 초반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이 시절 활동하던 이상민 우지원 김훈(이상 연세대), 전희철 김병철 현주엽(이상 고려대) 등 농구스타들은 실력뿐 아니라 외모도 빼어났다. 이들을 보기 위해 체육관에는 ‘오빠부대’를 비롯한 수천 명의 팬들이 모였다. 연세대-고려대 라이벌전 표를 구하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농구의 인기는 단순히 관람에 그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농구만큼 자주 했던 놀이가 또 있을까. 한 무리의 인원과 널찍한 공간이 필요한 축구나 야구와 달리, 농구는 소수 인원이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스포츠다. 이 때문에 콘크리트 건물 사이의 공터 주변 농구대에서 두세 명의 친구들과 농구를 하곤 했다. 농구를 잘하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수 있었고, 덩크슛을 할 경우 경외 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한두 켤레쯤 나이키와 리복의 에어 농구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경기 중간 중간에 스포츠 음료도 마셨다. 만화 ‘슬램덩크’와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인기는 농구의 흥행과 시너지 효과를 냈다.

이후 프로농구가 창설됐지만 그 시절의 열기는 느낄 수 없다. 취재를 위해 만나는 농구인들 중에도 그 시절 ‘농구대잔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농구의 인기 역시 이젠 추억이 돼버린 듯해 아쉽다.











[오렌지족] 93학번·백영옥(소설가)

유하 감독의 영화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가 나왔을 때가 1993년이다. ‘오렌지족’이란 단어를 들은 때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신해철이 ‘도시인’에서 “한 손에 휴대전화 허리엔 삐삐 차고”를 노래하던 때였으니 휴대전화와 삐삐가 혼재한 것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1995년 ‘째즈’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돌이켜보니 당시 주인공이던 한재석은 딱 오렌지족의 전형이었다. 외피는 화려하지만 내면은 공허한 캐릭터. 물론 이건 드라마에서 만든 오렌지족의 로망 버전이고, 매스컴에서 만든 오렌지족 이미지는 ‘돈 발라 유학길에 올랐으나 놀기 좋아하고 재능이 변변찮아 압구정동 일대를 외제차로 활보하며 세를 과시하고,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야! 타!를 남발하는 등 자신의 마초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던 부류’로 정의할 수 있다.

소설에도 쓴 적이 있는데, 압구정동에 살던 유학파 K는 부시(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대통령이 재임하던 때 미국 잡지 ‘BUSI- NESS’를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해 나를 경악시켰다.

“이야! 부시가 대통령이 되더니 잡지도 만들었네. 부시니스!”

내게 오렌지족은 ‘골빈당’ 이미지였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느낌일 뿐, 오렌지족이라 일컫는 부류는 다양했다. 사회적으로 이들에 대한 느낌이란 한국 사회가 소위 ‘부자들’에게 갖는 감정만큼이나 이율배반적이었을 것이다. 속물스럽다, 하지만 부럽다!

한때 잠시 몸담았던 패션계에도 오렌지족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어떤 오렌지족은 청담동에 레스토랑을 차렸거나 이른바 트렌드세터로 스타일 컨설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음반을 내고 인기의 꼭짓점에서 막 군대에 가야 했던 모 가수도 그 시절 오렌지족이었을 테고, 이명박 정부의 ‘영어 몰입화’ 정책을 비난하면서도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넣기 위해 골몰하고 있을 주부 중에도 오렌지족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전체보다 개인에 관심이 많은 터라 그 많던 오렌지족이 뭘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젠 보통사람들도 동네 슈퍼마켓에서 그렇게 비싸던 오렌지를 큰돈 들이지 않고 사먹는다는 사실이다. 오렌지가 귀해 오렌지의 짝퉁격인 ‘귤족’에 ‘낑깡족’까지 나왔는데, 이제 오렌지는 줘도 안 먹는 시절이 왔으니 시절 참 수상하지 않은가. 사람 사는 게 원래 그렇다. 그래서 오렌지족들은 뭐 하고 있을까라는 내 질문에 시큰둥하게 답한 내 친구의 말을 전하련다.

“글쎄, 마트에서 오렌지 사먹고 있지 않을까?”






[키노] 92학번·우승현(네이버 문화정보기획팀장)








문화잡지는 문화시장의 활황과 불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만큼 말할 ‘거리’가 있어야 잡지계도 생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이 공식에 대입하면 1995년은 문화담론이 폭발한 시기란 걸 알 수 있다. ‘씨네21’ ‘리뷰’ ‘오늘예감’ 그리고 ‘키노’가 아우성치듯 창간된 해다. 이제 살아남은 건 ‘씨네21’뿐이다. 주검이 된 95년산 잡지 가운데 ‘키노’는 2003년 99호를 끝으로 사망선고를 해 더욱 장엄한 엔딩을 보여줬다. 에디토리얼에 늘 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진합니다”라는 주문 같은 구호는 이제 볼 수 없다.

‘키노’는 1990년대 마니아들의 영화에 대한 짝사랑 그 자체다. ‘킬링 타임’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 단호하게 선을 그으면서, 목숨 걸고 영화를 사랑하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들은 거창했다. 영화를 예술로 승격시키기 위해 수많은 철학사조와 예술이론을 동원했다. 예컨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 제시한 유목민 개념으로 ‘와호장룡’을 읽고, 슬라보예 지젝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로 ‘공동경비구역 JSA’를 분석해 내려갔다. ‘씨네아스트’(아티스트가 아니다)란 말 정도는 기본으로 알아야 독해가 가능했다. 심지어 ‘키노’의 기자들도 그들의 잡지를 완독하기 힘들었다. 완독하면 다음 달 ‘키노’가 도착할 정도였다.

‘키노’의 페르소나 정성일 편집장의 ‘영화사의 작가주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오후 7시에 시작해 이튿날 오전 7시에 끝났다. 그는 미술과 사진에서의 작가주의 전통을 설명하는 데 5시간을 썼다. 그리고 그 전통을 영화에 이었다. 이것이 ‘키노’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당당했다. 정성일은 “자본주의는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지식을 간단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철학은 점점 광고카피가 돼가고 있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해 그들의 난해함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자신들이 사랑한 영화는 어렵게 말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학적이라는 비판을 숱하게 받았다. 일면 옳다. 그리고 ‘키노’에 무시당하던 영화인들은 그들을 저주하기도 했다. 치기 어린 기사도 있었기에 이 역시 옳다. 그런데 이제 영화인들이 ‘키노’의 부재를 아쉬워한다. 누구도 자신들의 영화를 ‘키노’처럼 애정을 가지고 봐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죽어라 만든 영화를 영화 사이트 별점만으로 평가받는 시대에 지음지기(知音知己)는 무척 그리운 존재일 터.

이제 세상은 영화에 대해 사유를 권하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무색의 주전부리 정보를 원한다(심지어 ‘씨네21’에도 리뷰는 아주 적다). 포털사이트 영화 평점만 있으면 그걸로 관람 전 메타정보는 충분하다. 이런 꼴 보기 전에 떠난 게 ‘키노’로선 다행인지도 모르겠다(‘키노’의 지난 목차를 보며 추억에 젖고 싶다면 이곳을 클릭하시라http://php.chol.com/~dorati/kino).













[해외여행] 96학번·심정희(‘에스콰이어’ 패션 디렉터)

나의 1990년대는 96년에 이르러 시작됐다. 그해 나는 대학생이 됐고, 가족 곁을 떠나 객지생활이라는 것을 경험했으며, ‘가난’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배웠다. 서울 마포구 상수동 일본식 적산가옥을 개조한, 월 23만원짜리 하숙방에 나를 남겨놓고 고향집으로 내려가면서 엄마는 “이젠 네가 알아서 살아야 된다”고 했다. 1년 뒤 외환위기와 아버지 회사의 부도 탓에 내 대학생활은 각종 아르바이트로 점철됐다. 낮에는 학교 매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압구정동과 청담동 일대에서 고등학생을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친구 사이에서 내가 ‘바쁜 아이’로 통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친구들은 캐나다로, 뉴질랜드로, 보스턴으로, 런던으로 떠났다. 그렇게 떠난 뒤 누군가는 1년이 지나서, 또 누군가는 6개월이 지나서 돌아왔다. 샘, 미카, 압둘, 제인, 레니 같은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쌓은 추억과 함께. 그 사이 서울에 남아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논술 답안지를 채점하거나 1200원짜리 김밥과 500원짜리 대학노트를 진열하러 다녔던 나에게 어학연수가 ‘꿈’이 됐던 것도 그 때문이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그러나 남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현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내게 진정으로 결핍됐던 것은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날 경제적 여유가 아닌, 마음의 여유였던 것 같다. 내 대학 4년은 내가 가르치는 (과외비 내는 날짜를 결코 어기지 않는 부모를 둔) 학생과 노동 강도에 비해 대우가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는 사이 흘러갔으니까.

2000년 여름, 1990년대가 끝난 그 시점에서야 나는 최초의 해외여행을 떠났다. 런던 파리 로마를 잇는 15박16일의 유럽여행 동안 내가 무엇을 봤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내가 루브르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 갔던가?

그러나 눅눅하지 않은 바람이 부는 여름밤이면 가끔 그때의 기분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로마 트레비 분수 앞에서 사먹었던 새빨간 체리 맛과 뺨을 스치던 바람의 느낌. 그리고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옆자리 승객들을 향해 느꼈던 묘한 우월감.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트렁크를 꼿꼿이 세우고 전차 한가운데 서서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 지금 로마에서 왔어요!” 내 어깨를 밀치고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눈을 흘기면서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 이래봬도 유럽 일주하고 온 사람이라구욧!’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92학번·이재원(출판기획자)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92년은 이전 학번들이 저마다 80년대의 셈을 마치고 신발끈을 고쳐 매기 시작하던 때였다. 여전히 현실의 모순과 팽팽히 적대하고 있는 별종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예전의 신념을 저버린 채 좋은 세상 따윈 오지 않을 거라고 투정 부리며 떠난 시기, 참으로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있던 시기, 돌이켜보건대 그게 바로 내가 접한 1992년이었다.

1990년대 학번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처럼 ‘80년대 정서’의 유지냐 청산이냐를 두고 한판 내기가 벌어지던 시기에 누구나 한쪽 발 정도는 우겨넣을 수 있는 ‘헐렁한 바지’였다. 요컨대 그것은 이론이라기보다 저마다의 도피처 혹은 면죄부였던 것이다.









아무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후로도 오렌지족·신세대 논쟁, 문화 담론 열풍, ‘불란서제 담론’이라는 명칭으로 희화화된 현대 프랑스 철학의 붐 등을 낳으며(교차하며) 끊임없이 자기복제를 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그 와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도저히 어찌해볼 틈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실패를 거듭했고, 떠난 사람들은 ‘대중문화의 사도’로 변모해 각종 매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역사적으로 모더니즘에는 마음껏 모욕해줄 전통이라도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는 그런 대상이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쓸데없이 호들갑스러웠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호들갑스러웠지만 이는 단지 겉모습일 뿐이었다. 즉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모더니즘이 수행하던 역할을 기이한 방식으로 되풀이했던 셈이고, 이런 점에서 (적어도 90년대 학번들은) 제법 실존적인 고민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제 그 셈을 마쳐야 할 세대는 ‘포스트 386’이 아니라 ‘포스트-포스트 386’일지도 모른다.






[한총련] 95학번·장유정(연극연출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유행하던 1995년 초봄 나는 대학에 합격했다. 떠나는 날 아침이었던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어머니는 데모만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부푼 기대를 안고 참석한 첫 오리엔테이션, 강의실 바닥엔 막걸리와 두부가 쫙 깔려 있었다. 처음 먹는 술은 달콤하고도 아릿했다. 거나하게 취한 나는 시킨다고 노래도 했다. 앞에 앉은 선배가 물었다. “한총련을 어떻게 생각하니?” “그게 뭔데요?” “내일 도청 앞에 나오면 알게 될 거야.”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의 눈빛엔 날이 서 있었다. 그래도 무섭기는커녕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내일 보자는 말을 해주는 그가 참 고마웠다.

다음 날 그는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없던 때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멀리서 끼익 하고 아스팔트 긁히는 소리가 났다.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끌며 천천히 쏟아져나왔다. 지옥에서 온 사자(死者) 같은 그 엄숙하고도 비장한 얼굴이라니. 순간 여기저기서 뻥뻥 최루탄이 터졌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눈은 따끔거리고 귀에서는 피가 나는 듯했다. 사람들이 뛰고 나도 뛰었다. 죄도 없는데 도망친다는 게 어쩐지 화가 났다.

학교 복도에서 그와 마주친 것은 몇 주가 지난 후였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극회에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로 우리는 자주 다퉜다. 연극의 목적을 공감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계몽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야단맞다 뛰쳐나와서는 내가 오리엔테이션 때 사람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며 울기도 했다.

졸업하는 날까지도 그와 서먹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와의 인연이 ‘잘못된 만남’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다. 내 연극인생은 거기서부터 비롯됐으니 말이다. 그 선배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서태지] 94학번·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1992년 3월 어느 토요일, ‘특종! TV연예’에서 신인 ‘서태지와 아이들’이 회오리춤을 선보였을 때 우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가요는 듣지 않겠어. 오직 록의 길만을 걸을 뿐이지”라고 허세를 부리던 나도 그 ‘우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가요계 인사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떨떠름한 평가에도 그날부터 10대들이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들에서는 거의 매일 ‘난 알아요’가 흘러나왔다.

신드롬은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카메라맨들의 넋을 뺐다는 현란한 춤, 랩과 댄스와 록이 녹아 있는 노래, 컬러TV가 원했을지도 모를 형광색 의상, 게다가 활동 중단 이후 새 앨범으로 컴백하는 마케팅 전략까지. 이는 1980년대와 90년대 대중음악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선을 긋는 모든 것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우리는 90년대를 80년대의 연장이 아닌, 전혀 새로운 10년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했다.

그들은 항상 짐작을 벗어났고 예측을 뛰어넘었다. 명반으로 꼽히는 2집의 ‘하여가’가 처음 방송을 탔을 때는 친구끼리 전화를 걸어 “야, 방금 ‘하여가’ 봤냐?”며 평을 나누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땅에서 영원히 비주류일 것 같았던 록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으로 한때나마 메인스트림에 올랐다. 록을 기조로 하되 힙합을 도입한 4집은 그 후 90년대 중반 주류 음악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데뷔에서부터 해산까지 그들의 모든 것은 ‘뜨거운 감자’였다. 그들로 인해 1990년대에 청춘을 맞이하고 보낸 이들은 ‘우리 세대의 음악’이라는 집단무의식을 향유할 수 있었다.

앨범을 낼 때마다 벌어지는 기성세대와의 트러블은 그런 세대의식에 불을 지폈다. 대중문화에 담론이란 개념이 도입됐으며, 대중음악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연구 대상이 됐다. 즐기는 것을 넘어 더 알고 싶다는 낯선 욕구가 폭발했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헤비메탈 아니면 하드록 일색이었고, 방송에서는 발라드의 르네상스가 펼쳐지던 시대였다. 그런 환경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해외 최신 장르를 실시간으로, 그것도 최초로 이식했다. 영어로만 듣던 노래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게 됐다는 청각적 체험을, 율동이 아닌 춤을 볼 수 있다는 시각적 체험을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아이들에게 선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디음악이 개화하면서 해외 음악은 실시간으로 이 땅에서 연주된다. 더 이상 ‘실시간 이식’만으로는 선봉의 깃발을 잡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서태지는 솔로로 데뷔한 뒤에도 계속 기존 노선에 충실했다. 뛰어난 프로듀서이자 탁월한 마케팅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프런티어로서 그의 자리는 굳건한가? 나에겐 의문이다. 1990년대의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찬사를 바칠 수 있지만 2000년대 서태지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90년대가 지나가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94학번·기훈석(KBS PD)

1990년대 초·중반의 대학은 여전히 80년대 감성이 지배하고 있었다. 집단주의는 여전히 대학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갓 입학한 새내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술을 마셔도 다 함께, 데모를 해도 다 함께, 공부를 해도 다 함께. “친구를 제쳐야 산다”는 교육을 18년간 받아온 내게 ‘손잡고 함께 가자’는 집단주의는 낯선 진리요 복음이었다.

그렇기에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느낀 당혹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주인공의 폐쇄적인 인간관계,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젊음,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 차라리 철저히 혼자인 기형도면 괜찮지, 소통을 갈구하면서도 관계 맺음에는 소극적인 이 괴상한 작품에 나와 친구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1990년대는 유사 이래 한 번도 부정되지 않던 단결, 협동 같은 집단주의 문화가 점점 힘을 잃고 개성, 자아성취 같은 개인주의 문화가 서서히 고개를 들던 시기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고개를 흔들지 않게 됐다. ‘의지의 부족함’은 ‘타자의 존중’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일상의 소중함’으로 치환돼 해석됐다. 대학사회 역시 마찬가지여서, ‘상실의 시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웃사이더나 들고 다니던 ‘듣보잡 소설’에서 ‘세련된 대학생의 필독서’로 위치가 격상된다. 나, 그리고 1990년대 청춘에게 하루키의 소설은 시대정신의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문제는 개인주의가 주류로 자리잡은 지금이다. 우리는 ‘포스트 하루키’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에서는 하루키 작품에 등장하는 1960, 70년대 학번을 단카이(덩어리)세대라 부른다. 개인주의 외에 아무런 특징이 없어서 ‘덩어리’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들이 사회 주축으로 활동한 시대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다.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상반되지만 소중했던 가치 이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준비라도 하고 있는가? 설마 ‘경쟁’이나 ‘실용’을 철학이라 하는 사람은 없겠지?











[심야 FM라디오 방송] 94학번·권도혁(큐박스닷컴 대표)

새벽 어스름 독서실 봉고차 안에서는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흘러나왔다. 1980, 90년대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 치고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듣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남들이 잘 모르는 음악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하나의 특권처럼 느껴졌다. 깜깜한 밤 잔잔히 울려퍼지는 새로운 음악과의 만남 덕에 집으로 가는 새벽길은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졌다.

교내 방송반 부원이던 나는 라디오에서 만나는 새로운 음악들은 꼭 메모해뒀다가 주말이면 세운상가에서 판을 구해와 점심 방송시간에 틀곤 했다. 잉위 맘스틴의 곡을 튼 날은 친구들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지만, 음악의 신세계를 접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심야 FM라디오는 그 시절 새로운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는 공간이었다. 내 또래들은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 새로운 음악을 만났고, 정은임 아나운서의 영화음악에서 새로운 영화와 세상을 만났다. 이 밖에도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신해철 유희열 씨 등이 진행한 ‘음악도시’는 마니아층이 두꺼웠던 프로그램이다.









세월은 흐르고 이젠 심야 FM라디오의 DJ들도 변했다.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지난해 문을 닫았고 정은임 아나운서는 고인이 됐다.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이 그 시절 라디오가 하던 ‘음악 발견과 공유’의 구실을 대신하고 있다. 나 역시도 그런 직업을 갖게 됐지만 여전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그 음악들에 대한 그리움은 첫사랑의 기억처럼 쉽게 떠나지 않는다.






[홍대문화] 91학번·강영민(화가)








고2였던 ‘쌍팔년도’부터 물감통을 들고 홍익대 앞을 들락거렸으니 이제 20년이 다 됐다. 홍대 앞은 내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다. 홍대 미대에 가려고 재수하던 시절, 홍대 앞은 성지 순례지요, 다다를 수 없을 듯 보이는 예술 고수들이 모인 이상향과도 같았다. 이런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었을까. 미술가 음악가 소설가 시인 오렌지족 등 대책 없는 여러 청춘들이 갑갑한 주변을 떠나 동류의 친구를 찾아, 살길을 찾아 홍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니 뭔가 재미있는 일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어느 도시에나 서브컬처라는 게 존재한다. 메인스트림 문화가 도시의 의식적인,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면이라면 서브컬처는 감추고 싶은 무의식과도 같다. 그리고 무의식에는 그 사람의 진솔한 매력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메인스트림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순수하고 치기 어린 날것의 원시성을 싹틔울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인디문화의 시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외국 대중문화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며 자란 1970년대생은 한국 사회 최초의 코즈모폴리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홍대 앞 클럽에서는 외국의 다양한 음악 사조를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었다. 운동권의 데모가 절정을 이룬 91년에도 신입생이던 나는 레코드 가게에서 수입 CD들을 뒤지고 있었고, 김지하와 김수영은 몰라도 하루키의 단편소설들은 줄줄 외웠다(기형도는 좋아했지만). 너바나의 음악을 처음 들은 곳도, 앞머리를 30cm나 세운 펑크족을 처음 본 곳도 홍대 앞이었다. 우리 세대에게 외국문화는 외국의 문화가 아니라, 주변의 경직된 공기를 바꿔주는 일상의 기호이자 존재론적 취향의 과시였다.

그러나 우리 세대도 이제 서른을 지나 마흔을 바라보고 있다. 외국문화엔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박수근 김지하 김수영이 다시 보이게 됐다. 결정적으로 이 땅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된 지 5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엄청난 자기모순과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자기모순, 분열을 우울증과 실없는 농담으로 포장해 살아가는 것까지 익숙해졌다.

입시지옥과 취업난을 거쳐 외환위기로 사회에 내동댕이쳐진 1990년대 학번은 자본주의의 말단 급사로, 또는 외롭고 배고픈 인디로 10년 넘게 살아왔다. 생리혈처럼 삶에 핏빛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을 터. 그럼 이제 늙었냐고? 아니, 이제 생리를 막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386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작은 남근(男根)들은 서로 연대해 근대화라는 거대 남근을 쓰러뜨렸지만, 이후 부모 재산을 탕진한 멍청한 큰형처럼 내 앞에 섰다. 감각적이며 개인적이고, 거대 담론에 익숙지 못한 우리 세대는 잉태를 기다리는 자궁과도 같다. 생리도 했으니 이제 무엇을 낳을 수 있을까?










90년대 ‘낭만 학번’의 추억


























장미 한 송이 들고

서성이던 오빠…













3가지 세대 8자형 ‘기묘한 동거’
‘삐삐’에 낭만 찍고 ‘허동택’에 열광하고
험하고 쓰러져도 내 갈 길 간다
투명한 ‘X’ 현실 해부, 그래서 위험하다
친구야 이 길에 뭐가 있을까, 천천히 가자








One Comment

  1. 386세대의 끝자락을 얼핏 스치듯 맛보았던 90년대 학번들을 일본의’신인류족’이니 ‘X세대’니 하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죠.
    386세대와는 다른 개인주의적인 면만을 부각시켰던 언론의 행태가 꽤 인상적이었는데..불온한 세대, 미숙한 세대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싶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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