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뉴 시네마




지난 6월 22일 시작된 서울 아트시네마의 “아메리칸 뉴 시네마 특별전”은 7월 8일까지 계속된다. TV 화면에서 벗어나 스크린을 통해 감상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 것! 수십 년 이나 지난 낡은 영화들이라고 폄하하지 말 것. 그들의 젊은 감수성은 지금에서도 날 것처럼 생생하고 강렬하다.



아버지세대로부터의 저항 – 반문화, 세계의 뉴웨이브



60년대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꼽자면 그것은 바로 혁명일 것이다. 아시아의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5월 혁명을 거쳐, 멀리 아메리카 대륙의 쿠바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항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60년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 걸쳐 기성세대의 모든 것에 대한 도전으로서 다시 말해 반체제로서 나타났다. 59년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의 성공은 승리에 대한 낙관을 가지게 했다.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고, 새로운 사회 사상들과 함께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이 그 힘을 더했다. 사회주의와 반자본, 반문화운동이 득세함과 더불어, 실제로 수많은 국가들이 민족해방과 반자본주의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제국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상기되었고, 포커스는 베트남에 맞추어졌다. 프랑스가 패퇴하고, 미국이 수렁에 빠진 반제국주의전쟁. 그것은 내전이 아니라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문화적으론 낡은 기성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자, 새로운 질서와 세계관을 의미했다.



세계는 새로운 희망에 젖어 있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란 개념도 등장했고, 중국 문화혁명은 새로운 집단주의를 꿈꾸게 만들었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비롯하여, 네오 이탈리안 시네마, 시네마 노보, 아메리칸 뉴 시네마 등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변화의 열망 때문이었다.



누벨바그는 영화의 모더니즘 운동이었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내용, 형식, 이데올로기…… 전세대의 영화감독들을 깔아 뭉개면서, 장차 메가폰을 잡을 ‘까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이 비판한 것은, 감독이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작가’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작가의 리스트를 만들고, 장르를 복권시키면서 새로운 영화의 문법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 영화에서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 자의식을 들여다 보는 것, 그것은 영화에 대한 반성이었고, 사회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었다. 중남미의 국가들은 제3세계 영화라는 이름으로 그들 스스로 영화의 문법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60년대는 실패한 시대였다. 프라하의 봄이 사그라지고, 68년 5월 혁명이 좌절되면서 뉴 웨이브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혹자는 고독한 자기완성의 길로, 혹자는 상업적인 제도권 안으로 또는 소집단 운동으로, 그러나 제도권으로 돌아오면서도, 그들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혁명적 영화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것은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끊임없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질문이었다. 60년대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것으로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60년대의 열풍이 지나간 그 끝자락, 완고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뒤늦게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메리칸 뉴 시네마





흔히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대표작으로는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마이클 니콜스의 “졸업”(1967),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1969), 존 슐레진저 의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아서 펜의 “작은 거인” (1970) 등이 꼽힌다. 그리고 로버트 알트만, 샘 페킨파, 밥 라펠슨, 마틴 스콜세지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의 이름이 거론된다. 60년대 “카운터 컬쳐”의 영향 하에서 B급 영화의 반사회, 반문화 정신으로 그려낸 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자본과 전통,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냈다.



미국영화는 30~40년대 헐리우드 스튜디오의 황금기를 지나, 1960년대 점차 침체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직 상업적 잣대로 평가받던 장르영화의 감독들은 프랑스의 젊은 비평가들에 의해서 재발견 되며 작가로서 추앙되었지만, 자국내의 완고한 영화 종사자들은 이러한 변화- 말 그대로 새로운 세대의 물결 – 에 지극히 둔감했다. 전후 베이비붐 새대의 등장과 TV의 보급확대는 헐리우드의 영화산업 종사자들에게 계속적인 경고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변화할 만한 능력을 가지기 못했다. 헐리우드를 구원할 새로운 힘은 스튜디오 밖에 있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버지의 미국은 이미 늙어버렸고, 시대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흑인 민권운동과 반전평화운동, 여성운동과 히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앞에 영화 산업 만이 예외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영화세대의 출현과 함께 그들 자신의 사상과 언어와 스타일과 미학을 담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이 등장이었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60년대 전 지구적 규모의 월남전 반대시위와 히피문화, 미국 내의 민권운동, 아버지 세대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으로부터의 독립 등을 주요문제로 다루었다. 6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더 이상 아버지 새대의 전쟁 승리의 낙관적 세계관과 자신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베트남, 열대우림의 늪과 같은 수렁 속에서 그것들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기존 영화의 해피엔딩 혹은 낙관적 낭만주의는 사회적 모순과 그에 대한 현실비판으로 대체되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저항과 폭력 앞에서 기성세대는 분노했지만, 영화는 폭발적인 박스오피스의 수입으로 대중의 변화를 향한 욕구를 증명했다.” 친구의 어머니를 욕망하는 “졸업”을 두고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당혹해 했지만, 영화는 변화하는 사회적 윤리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요나스 메카스, 케네스 앵거, 앤디 워홀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뉴 아메리칸 시네마 그룹”이 그들의 성명서를 통해 밝힌 것처럼 새로운 시대는 “허위로 가득 차고 세련되며 호화로운 영화를 원치 않”으며, “거칠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영화”를 원하고 있었고, 그러한 변화를 대표하는 영화들과 사조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대중적인 오락영화 또는 현실과 무관한 낙관적 낭만주의로 일관한다는 미국영화에 사회적 리얼리즘을 도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의 영화제작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결국 방탕한 아들이 노쇠한 아비를 구원한 셈이다.


헐리우드는 언제나 상업영화, 영화산업의 기본적인 틀 위에서 주변의 모든 것을 흡수해 왔다. 60년대의 “아메리칸 뉴 시네마”로부터, 70년대 독일 “뉴 저먼 시네마”의 일군의 작가들과 80년대의 유럽과 남미를 지나 90년대의 홍콩, 2000년대 일본의 호러와 애니메이션, 한국의 장르영화에 이르기까지. 불가사리처럼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운 막대한 영화자본은 끊임없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자신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아 왔던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와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의 등장은 상업영화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만든 기폭제였으며, B급영화의 전통과 하위장르의 관습을 뒤섞고 대중문화의 이미지로 장식된 새로운 상업영화의 기법을 만들어낸 스필버그 사단은 그 이후 지금까지도 헐리우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바야흐로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개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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