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죽은자를 위한 미사






레퀴엠 – CJK8점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마리네티는 아직 ‘전쟁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전쟁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파괴력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공격과 수비를 반복하는 지루한 참호전 속에서 대부분의 파괴와 살육은 죽는 자와 죽이는 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는 지극히 인간다운(?) 방식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원자폭탄은 재래식 폭탄과는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 그것의 파괴력은 더 이상 인간다운 규모가 아니라 신의 규모에 도달한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의 ‘충격과 공포’를 보고, 실제로 일본인들은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숭고한 파괴는 그 규모와 위력으로 인간을 간단히 압도해버린다. (p.55~56)



현대예술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현대미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늘날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미술관에서 기대하는 것은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다. 거기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희한하고 해괴한 발상으로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우리를 ‘경악’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충격과 경악’이라는 현대미술의 원리가 마침내 전쟁의 원리로 실현됐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예술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고 자신들의 작품을 현실 속에 실현하기를 꿈꾸었다면, 그들의 꿈은 역설적으로 이루어졌다. ‘충격’과 ‘공포’라는현대예술의 원리는 정말로 화랑과 박물관에서 걸어나와 우리 눈앞에서 끔찍한 현실이 되었다. (p.60)






Otto Dix, War Triptych (1932)



포탄에 날려 허공에 걸린 시체, 참호 속에 머리를 거꾸로 처박은 시체, 터져나온 내장, 여기저기 흩어진 사지, 피와 범벅이 된 진흙탕, 그 속에 처박힌 시체들. 하필이면 왜 저렇게 끔찍하게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딕스는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 삼단제단화의 형식을 이용함으로써 그는 이 끔찍한 전쟁의 장면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오버랩시킨다. 트립티콘 안의 네 장의 그림은 아침, 점심, 저녁, 밤…… 병사의 일상을 보여준다. 새벽 안개를 뚫고 전선에 나간 병사들은 종일 포격과 사격에 시달리다 밤이 되면 시체가 되어 무덤에 눕는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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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iraqbodycount.net]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2003년 3월20일부터 2년반이 넘는 시간 동안
이라크 민간인 26000 여명이 사망했다.



‘신의 뜻’이라는 케케묵은 낡은 중세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21세기 전쟁에서 부활했다.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학살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벤 린드크비스트의 ‘폭격의 역사’를 다시 꺼내 읽다.
비서구인에 대한 서구인의 경멸감, 즉 인종주의와
대량학살에 의한 잠재적 위협의 근원적 제거라는 제국주의 시대이래의 지적 전통을
폭격의 역사를 통해서그 위험한 무의식의 욕망을 밝히고 있다.





2 Comments

  1. 뜬금없는 딴 얘기… "민중의 반역"도 읽어보소….휘릭~

  2. 민중의 반역 -_-? 그런 책도 있단 말여? 먼 내용인뎁 -ㅅ-? 제목이 상당히 불온하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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