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월


2008년 6월 1일.

여름으로 가는 새벽 삼청동 거리는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었다.
버스 두대에 가로막힌 골목 앞에서 가로등도 꺼졌다.
방송 차를 통해 들리는 익숙한 여경의 경고방송이 들려왔고, 곧 살수차에선 거센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우박이 내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물줄기는 순식간에 온몸을 적셨고, 곧 경련이 일었다.
한기가 느껴졌지만, 가슴 한곳에선 열기가 느껴졌다.
닭장차, 전경의 검은 화이바, 날 선 방패. 딱 12년 만이다.


1995년5월 18일.

학교 앞 거리에서 맞딱드린 전경의 철망사이로 땀에 젖은 얼굴에 자리잡은 증오와 절망과 두려움 섞인 눈을 떠올렸다. 그때 내 손엔 쇠파이프가 들려져 있었다. 우연히 전경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나는 “부르주아의 집행부의 폭력수단”으로서의 전경이 아닌, 검은 방석 복 속 내 또래 남자아이를 목격했다. 그날 오후 학교 앞의 시위는 저녁 즈음에 있을 더 큰 단위의 집회를 위해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다. 특별한 것 없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상적인 교내집회의 풍경이었다. 평온한 어느 평일 오후.



다시, 2008년 6월 1일.

새벽 거리에서 살수차의 물세례를 받으며 불현듯 12년 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살수차의 한차례 물세례가 지나간 후, 구호는 멈추지 않았다.
“온수!, 온수!, 온수!”
새벽 그 시간 까지 거리 위의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두려움은 전경들의 것이었다. 갖은 욕설과 함께 악다구니를 쓰며,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에 고개를 외면하며, 방패로 땅을 치면서 그들은 그 잔인한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지칠 줄을 모르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몰려왔다.



1996년 9월 군입대를 앞둔 어느 날,

그 해 8월의 “연대사태”는 학생운동의 몰락을 가져왔다. 종합관은 여전히 출입금지였다. 나는 침울했다.
학교정문의 한줌도 안 되는 시위대열을 무심히 지나치며, 한 시대의 끝을 실감했다.
바로 한달 전 수 만의 학생과 전경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전쟁을 벌였다.
늘상 그렇듯, 시위대가 차도로 진출했지만 지나가는 차들은 그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전경들은 길 건너편에 앉아 시위대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위대는 곧 교문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306 보충대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다시, 2008년 6월 1일.

온라인 상의 노드와 노드를 연결하는 링크는 오프라인의 거리를 깃발과 소년과 소녀들, 아이들, 여자들, 아저씨들로 현시(顯示)되어 메우고 있었다. “토론의 성지 아고라” 깃발은 대열의 맨 앞을 지키고 있었고, 고딩들은 “물 다 떨어졌냐! 더 쏴바!” 라며 소리를 질렀다. “애국가”가 “복수가”를, “대한민국 헌법 1조”가 “전대협 진군가”를 대신했다. 운동권의 투박한 계몽주의 대신 네트워크의 재치와 연대가 있었다.
어슴프레하게 날이 밝아오는 새벽, 살수차가 사라졌고, 체포조가 투입되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던지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먼저 몸이 반응했다. 무서웠고 쪽팔렸다. 축 젖은 옷이 민망했고, 불편하고 처연했다. 대열을 한참 벗어나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쭈그려 앉았다. 젖은 담배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혀에서 누릿한맛이 났다. 물에 젖은 깃발과 그 아래 사람들은 아직 거리에 남아 있었다. 지난 새벽 대열의 앞에 있던 눈에익은 젊은(어린) 녀석들은 아직 거기 전경대오의 바로 앞에 여전히 서 있었다. 부러웠다. 체력과, 결기가.
젖은 몸으론 택시를 타기 미안했고, 버스를 탈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걷고 걷고 걸었다. 시내를 한참 걷다 보니 피곤함이 미안함을 이겼다.택시를 잡아탔고 집으로 돌아왔다.택시 안에서 거리는 완연한 아침이었다.
그날밤, 십여년전과 똑같지만 전혀 다른 싸움이 있었다.
그러나, 기름진 얼굴의 혐오스런 멍청한 꼰대는 언제나또래들끼리의 전선 뒤에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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