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수한가 – 박노해

찬 새벽
고요한 묵상의 시간
나직히 내 마음 살피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털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의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박노해




옛일기를 꺼내다.
1994년 3월부터 시작되는 검은표지의 노트는
책상 덩치큰 책들 사이에서 먼지만 뽀얗게 뒤집어 쓰고선,


제 존재를 희미하게 지워가고 있었다.
노트의 맨 앞장엔 박노해의 이 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순수한가”
그때 3월 16일 대학시절 처음으로 집회에 나갔다.
5월 12일, 수감된 선배에게 보내는 엽서를 부끄러움 때문에 쓰지 못했다.
6월 6일, 얼굴을 알지 못했던 어느선배의 “잔치는 끝났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6월 26일, 진지협의 파업이 있었고 경희대에서 이틀을 보냈다.
6월 30일, 비온뒤 흐렸던 그날, 처음으로 꽃병을 들었다.
9월14일, OO와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9월19일, 문과대 해오름식, 선봉의 터에서 50여명이 모였다.
11월 5일,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예술의 비인간화”를 읽었다.
11월 19일, 여의도 한국노총앞에서 “어용노충 분쇄”를 위한 시위를 했었다.
12월 24일,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그해 대학선거에서 비운동권의 대약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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