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를 써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네 벽에 가득 찬 것은 어둠뿐인 이곳에서는
돼지처럼 넣어준 콩밥이나 받아먹고
신트림 구린 방귀나 풍기고 사는 이곳에서
시를 써보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가 무슨 신성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펜이 없고 종이가 없고 형편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흙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흙과 노동이 빚어낸 생활의 얼굴이 없기 때문입니다
밝음을 위한 무기 싸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시의 기반은 대지입니다
대지를 발판으로 일어서서 그 위에
노동을 가하는 농부의 연장과 땀입니다
씨를 뿌리기 위한 바람과의 싸움입니다
뿌리를 내리기 위한 어둠과의 격투입니다
노동의 수확을 지키기 위한 거머리와 진드기와의 피투성이의 실랑이입니다
추위를 막기 위한 벽과의 싸움이고
불을 캐기 위한 굴속과의 숨바꼭질입니다
대지 노동 투쟁이 기반을 잃으면
내 팔의 힘은 깃털 하나 들어올릴 수 없습니다
이 발판이 없어지면 나는 힘센 자의 입김에도 쓰러지고 마는 허깨비입니다
내가 한 줄의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가뭄을 이기는 저 농부들의 두레에 내가 낄 때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내가 있고
그들과 더불어 내가 사고하고
그들과 더불어 내가 싸울 때
그때 나는 한 줄의 시가됩니다



김남주, “편지1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지상으로 유배되어 이 세상 방식대로 알맞게 부패하지 못하고,


차가운 눈속에 박제된 가랑잎처럼, 겨울이 지나도


겨울을 증명해야 했던 사람.


우리의 자랑스런 과거이자,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이었던 사람.


밤이 대낮처럼 발가벗고,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휘황한 거리에서 할일이 없었던 어제의 전사.



최영미, “김남주를 묻으며”



십년 열흘 전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한시대는 끝났다.


책장속에서 먼지 쌓인 그의 시집을 들추며,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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